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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월동안 일하다 보면 사람이 미쳐버려요. 왜냐면 이게 다 거짓말이거든. “

유사투자자문업체 전직 직원 A씨는 최근 회사를 그만뒀다. ‘아예 주식을 해 본 적이 없다’는 A씨는 해당 업체에서 1년여간 주식 투자를 권유하는 상담사 일을 했다.파워사다리

퇴사 직전에는 ‘애널리스트로 일해보라’는 제의까지 받았다. 회사는 애널리스트 자격증, 증권사 경력까지 허위 기재해 광고에 실었다. 더 이상 거짓말을 하기 두려웠던 A씨는 퇴사를 결심했다.

A씨는 23일 머니투데이와 인터뷰에서 특정 유사투자자문업체의 내부 사정을 상세히 전했다. 현장 폭로다.

이 업체는 서울뿐 아니라 인천, 대구, 광주 등에 지사를 둘 정도로 규모가 크다. 해당 업체는 규모로 따지면 유사투자자문업체 2~3위권이다.

A씨는 해당 업체 광고에 등장하는 애널리스트 등은 대부분 자격증(금융투자분석사)조차 없거나 자격증이 있더라도 대부분 기재된 경력사항이 ‘가짜’라고 주장했다.

A씨는 “홈페이지 등에 기재된 증권사·운용사 등 근무 경력은 백프로 허위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고객 상담사로 일하던 직원을 애널리스트로 앉히기도 하고 회사에서 활동하는 애널리스트 중에는 유플러스 상담사 출신도 있다”고 설명했다.

고객 수익률 인증 후기 등을 조작하는 일도 빈번하다. A씨는 “영세한 업체의 경우 고객 인증 카톡 등을 전문적으로 만들어주는 대행업체까지 있다”며 “큰 규모 업체는 자체 인력이 있어 포토샵을 통해 인증 카톡을 조작한다”고 말했다.━“회사가 직원들 목줄 쥐었다”…고소 협박에 ‘피 마른다’

해당 유사투자자문업체 사이트에 올라온 고객 감사 후기. 전직 직원 A씨는 고객 인증 후기 등이 포토샵으로 조작됐다고 주장했다.
해당 유사투자자문업체 사이트에 올라온 고객 감사 후기. 전직 직원 A씨는 고객 인증 후기 등이 포토샵으로 조작됐다고 주장했다.

사실상 같은 회사인데 간판만 바꿔 여러 이름으로 운영하기도 한다. 확인 결과 해당 업체를 포함한 3곳이 똑같은 애널리스트 사진을 사용하고 있었고 이들 중 두 곳은 호스트 서버 소재지까지 같았다.파워볼

A씨는 입사 이후 회사의 거짓말을 알았지만 선뜻 퇴사하지 못했다. 그는 “회사가 직원들의 목줄을 쥐고 있다”고 표현했다.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1대1 종목 추천을 일삼도록 유도한 뒤 퇴사하거나 회사 지시에 불응할 경우 이를 신고하겠다고 협박했다는 주장이다.

자본시장법에 따르면 유사투자자문업체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조언을 제공할 수 있지만 일대일 투자정보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 이를 위반할 시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A씨는 “근로계약서에 1년 이내 퇴사 시 급여 전액환수 조건이 있다”며 “회사 측에서는 퇴사를 접던지, 받았던 급여를 내놓으라고 협박했다”고 밝혔다. 만약 돈을 내지 않으면 이에 대한 보복으로 회사가 보유한 직원의 1대1 투자자문 기록 등을 토대로 신고한다는 것이다.

A씨는 “회사측은 일부러 한번에 고소하지 않고 건별로 한다”며 “이게 피가 마른다. 한 건 고소하고, 끝날 때쯤 다른 건을 고소하는 식으로 회사 뜻에 순응할 때까지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보통 5~6개월만 근무해도 개인 리딩한 규모가 어마무시한 숫자가 되는데 이게 쌓이면 구속되거나 징역형까지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해당 규정은 금융투자업 등록없이 투자결정을 위임받아 자산을 운용하거나 투자판단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경우를 막기 위한 규정이다. 그러나 업체는 이 규정을 오히려 직원들을 옭아매고 협박하는 수단으로 악용한 것이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유사투자자문의 1:1 종목추천 등은 행정제재가 없고 모두 형사처벌 대상”이라며 “직원이 불법행위를 저지른 업체 대표를 기소하더라도 경찰 수사 과정에서 대표가 부인하면 실제 처벌은 신고자(직원)가 받을 수도 있다”고 밝혔다.

이들 의혹과 관련 해당 업체측은 “서로 다른 업체의 애널리스트 사진이 동일한 것은 자회사이기 때문이고 기재된 경력도 허위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또 “직원에게 매일 1:1 리딩은 불법이라는 사실을 교육하고 있고 1:1 리딩을 유도한 적은 없다”고 해명했다.━늘어가는 피해자…합법 업체도 ‘도매금’에 억울

비단 해당 업체만의 문제는 아니다. 특히 올해 개인투자자가 증시에 대거 유입되면서 소위 ‘리딩방’으로 불리는 유사투자자문업체가 난립하고 있다.파워볼

금융소비자 정보포털 파인에 따르면 현재 신고된 유사투자자문업자 수는 2029개로, 이 가운데 올해 들어 신고한 유사투자자문업자는 462개에 이른다.

이는 지난해 신고건수(500건)를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신고하지 않은 채 운영하는 리딩방까지 포함하면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상당수 리딩방이 이같은 불법 행위를 서슴치 않고 저지르면서 피해자도 늘고 있다는 것이다. 올해 들어 지난 8월까지 한국소비자원에 접수된 유사투자자문업 피해구제 신청건수는 1777건에 달한다. 이미 2018년 연간 신청건수(1621건)를 넘어선 수치다.

한 유사투자자문업체 피해자는 “급등할 종목을 골라준다고 해 수익 10%를 주는 조건으로 보증금을 냈지만, 종목은 오르기는커녕 손해를 봤다”며 “지금은 연락이 두절돼 보증금도 받지 못했다”고 호소했다.

합법적으로 운영하는 업체마저 ‘도매금’으로 묶여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소규모 리딩방을 운영 중인 한 전업투자자는 “우리 지식으로 여러 사람의 생계를 책임진다는 사명감으로 일하고 있는데도 유흥 도박업과 유사한 취급을 받고 있다”며 “민원과다발생 업종이라는 이유로 카드사나 결제대행업체도 가입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토로했다.━‘뒷북 대응’ 나선 당국…업체는 2000개, 인력은 6명━당국은 뒤늦게 나섰다. 지난 21일 금감원은 유사투자자문업의 정보전달 수단을 나열하는 신고서 서식에서 ‘단체대화방’을 삭제하는 내용의 금융투자업규정 시행세칙을 사전 예고했다. 단체대화방을 통해 불법 투자자문하는 ‘주식 리딩방’이 급증하자 이를 차단하겠다는 취지다.

또 금융당국은 일괄점검과 암행점검을 병행할 계획이다. 암행점검은 금감원 직원이 유사투자자문업자의 유료회원으로 가입해 불법행위 여부를 점검하는 행위다.

그러나 이미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업체를 모두 단속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현재 주식 리딩방 점검을 담당하는 금융감독원 자산운용검사국 인력은 6명. 국내 등록된 유사투자자문업자가 2000개가 넘는 점을 고려하면 역부족이다.

A씨는 “지역별로 수많은 유사투자자문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에 작정하지 않는 한 못 잡을 것”이라며 “폐쇄적인 집단이기 때문에 외부에서 업체 내부 일을 알기 힘들다”고 말했다.강민수 기자 fullwater7@mt.co.kr

국감서 “감사때 위증” 지적받자 鄭사장 “의원님도 그말 책임져라”

정재훈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이 23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종합국정감사에서 ‘위증에 대해서는 의원도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발언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 오른쪽은 엄재식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장. 2020.10.23. 국회사진기자단
정재훈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이 23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종합국정감사에서 ‘위증에 대해서는 의원도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발언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 오른쪽은 엄재식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장. 2020.10.23. 국회사진기자단

정재훈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이 국정감사에서 월성 1호기 경제성 평가 조작 의혹과 관련해 야당 의원과 설전을 벌이다 사과했다. 정 사장은 월성 1호기 경제성 평가와 관련해 감사원으로부터 엄중 주의 처분을 받았다.

23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국민의 힘 황보승희 의원은 한수원의 월성 1호기 경제성 평가 조작 의혹을 집중적으로 캐물었다. 그러나 정 사장은 “감사원 보고서 어디에도 조작이란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며 부인했다. 황보 의원이 정 사장에게 “지난 행정감사에서 위증한 것도 있다”고 하자 정 사장은 “위증에 대해서는 나중에 의원님도 책임을 지시라. 저는 위증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야당 의원들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국회의원에게 위증에 대해 책임을 지라니”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더불어민주당 소속인 이원욱 과방위원장도 “매우 과했다. 여기는 단순하게 국회의원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국민을 대표하는 자리다. 국민에 대한 모독행위로 보여진다”며 정 사장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이에 정 사장은 “과했다고 생각하고 유감의 뜻을 표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위원장이 다시 “유감이 아니라 사과하라”고 지시했고, 정 사장은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위원장이 이어 “일어나서 머리 한번 숙이시라”고 하자, 정 사장은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정 사장은 이날 한수원이 월성 1호기의 경제성 평가를 조작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하지만 월성 1호기 경제성 평가는 최초 3707억원에서 최종 224억원으로 대폭 축소됐다. 경제성 축소에도 계속 가동이 이익이라는 결론이 나왔지만, 한수원은 조기 폐쇄를 밀어붙였다.

정 사장은 또 “안전성과 정부 정책에 대한 협조, 규제 환경을 종합적으로 판단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 사장 발언은 안전성이 아닌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월성 1호기를 폐쇄했다는 2018년 6월 한수원 이사회 회의록 내용과도 배치되는 것이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민주당 의원들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감사원의 이번 감사 결과만으로는 탈원전 정책의 옳고 그름도, 월성 1호기 폐쇄의 적절성도 판단할 수 없다”며 “우리는 월성 1호기 폐쇄가 불가피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고 했다.

’17~’19년 454억 지원..결과는 10곳 중 4곳 휴·폐업
부족한 지원 및 사후관리 미흡 지적..코로나19로 어려움 가중
서대문구 청년몰 가보니..”월 매출 코로나 이전보다 90% 줄어”
중기부 “2018년에 사후관리 사업 마련. 청년 상인 자질도 중요”

지난 21일 서울 서대문구 청년몰 '이화52번가' 거리에 '점포임대' 팻말이 붙은 공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대학가 상권임에도 코로나19로 거리에는 인적이 드물다. (사진=고정삼 기자)
지난 21일 서울 서대문구 청년몰 ‘이화52번가’ 거리에 ‘점포임대’ 팻말이 붙은 공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대학가 상권임에도 코로나19로 거리에는 인적이 드물다. (사진=고정삼 기자)

“청년몰 개장할 때 시작했던 청년 상인 중에 지금 남아 있는 분은 없어요. 지금은 기존에 계셨던 상인분들만 남아 있는 거예요”

지난 21일 오후 2시30분께 서울 서대문구 ‘이화52번가 청년몰’이 조성된 골목 상권에는 ‘점포 임대’라는 팻말이 붙은 공실들로 가득했다.

지난 2017년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의 지원을 받고 야심차게 창업했던 청년 상인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감당하지 못하고 줄폐업하면서다.

이화여대 정문 바로 왼쪽 골목에 자리한 대학가 상권임에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대학들이 온라인 강의로 전환하면서 해당 골목을 찾는 학생들이 눈에 띄게 줄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4년째 떡볶이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이모(33)씨는 “이 상권은 대학생들이 주요 고객인데 코로나19로 개강이 미뤄지거나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하면서 학생들의 발길이 끊겼다”며 “코로나 사태 이전과 비교하면 월매출이 90% 이상 줄었다”고 토로했다. 이어 “현재 청년몰에 입점한 청년 상인으로서 받는 지원은 없다”며 “창업 관련 교육을 신청할 수 있다고는 알고 있지만 가게를 비워두고 교육을 받으러 갈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6월 ‘이화52번가’ 청년몰에 신규 입점해 미국식 덮밥집을 운영하는 이모(28)씨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청년몰에 청년 상인으로서 신규 입점했지만 무늬만 청년 상인일 뿐 지원은 전무했다. 청년몰 조성 사업 기간에 입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싱글대디인 이씨는 “그나마 배달 주문 수요가 있어서 간신히 적자는 모면하고 있다”면서도 “혼자 10시간 넘게 일하면서 회사 월급보다 적은 수입으로 자녀를 키우며 생계 유지하는 게 너무 어렵다”고 호소했다.

청년몰 내 청년 상인 점포 41%가 폐업

정부는 청년몰에 입점한 청년 상인 점포를 대상으로 지난 2017~2019년까지 3년간 450여억원(2017년 187억1000만원, 2018년 150억5000만원, 2019년 117억원)을 지원했다. 하지만 청년 상인들은 휴·폐업 위기를 면치 못하고 있다. 청년 상인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지원과 사후관리가 미흡한 점이 휴·폐업의 확대 이유로 꼽힌다.

청년몰은 중소벤처기업부(중기부)와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소진공)이 전통시장 활성화와 청년 상인 육성을 목적으로 ‘청년몰 조성’ 사업에 따라 마련되는 청년 창업 공간이다. 청년몰에 입점한 청년 상인에게 인테리어 비용, 임차료 지원과 창업·경영 컨설팅 교육을 제공한다.

문제는 청년몰에 입점한 상인들의 지원이 2년간 한시적으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충분한 경영 노하우를 습득해 전문성을 갖추기도 전에 각자도생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이다.

실제 정부가 청년 상인 점포에 3년간 454억원을 지원했지만, 지원 대상 점포 중 41%가 현재 휴·폐업 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이주환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18일 소상공인진흥공단으로부터 받은 ‘최근 3년간 청년 상인 영업현황’ 자료에 따르면 정부가 2017~2019년 지원한 점포는 총 594개로 이 중 41%(245개)가 현재 문을 닫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이 의원실은 창업 후 2년이 지났을 때 심한 경우 점포 생존율이 41%까지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지난 21일 한창 저녁 장사로 바쁠 시간대인 오후 6시10분께 경동시장 청년몰. 총 25개의 테이블이 마련돼 있지만, 손님은 한 팀밖에 없었다. (사진=고정삼 기자)
지난 21일 한창 저녁 장사로 바쁠 시간대인 오후 6시10분께 경동시장 청년몰. 총 25개의 테이블이 마련돼 있지만, 손님은 한 팀밖에 없었다. (사진=고정삼 기자)

코로나19 여파로 청년몰 점포 매출액 20%나 감소

지난 21일 한창 저녁 장사로 바쁠 시간대인 오후 6시께 경동시장 청년몰에는 홀에서 식사를 하는 손님은 단 두 명에 불과했다. 해당 청년몰에 입점한 정모(36)씨는 “코로나19가 발발하면서 월 매출이 지난해의 3분의 1수준으로 급갑했다”고 전했다.

이어 “현재 정부 지원으로는 임차료 지원이 가장 도움이 되고 있다. 내년 8월이면 임차료 지원은 끝나고, 월세 계약도 민간 소유주와 다시 해야 하는데 평당 6만원으로 임대료가 올라간다”며 “청년몰 입지가 3층인데, 임차료 지원도 없이 그 정도 월세를 내야 한다면 이곳에 남아 있기 힘들다”고 푸념했다.

지난해 개장한 경동시장 청년몰에 입점한 청년 상인들도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았다. 사업이 끝나는 시점인 내년 7월에 지원이 끊기고, 코로나19가 장기화할 경우 폐업 위기에 놓일 가능성이 큰 상황이다.

청년몰에서 케이크를 판매하는 최모(34)씨는 “초기에 오프라인 판매만 했을 때는 입지 조건이 열악한 탓에 매출이 전무했다”며 “지금은 직접 SNS로 홍보해서 손님을 늘려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여기 있는 상인분들 모두 개인적으로 어떻게든 판로를 뚫으려고 노력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실제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이철규 의원이 소진공으로부터 제출받은 ‘청년몰 조성현황’ 자료를 분석한 결과 청년몰의 올해 월평균 매출액이 지난해보다 20%나 감소했다.

서울 ‘이화52번가’, 경기 수원 ‘영동시장 청년몰’, 평택 ‘통복시장 청년몰’과 대전 동구 중앙시장에 마련된 ‘중앙메가프라자 청년몰’ 등 지난 2017년에 조성된 청년몰 14곳(점포수 256개)의 경우 코로나19 사태가 발발하기 전인 지난해 월평균 매출은 559만원을 기록했다. 하지만 올해는 이보다 12.7%나 감소한 488만원으로 줄었다.

중기부 관계자는 “청년몰 사업을 2016년도에 시작했다”며 “2017~2018년도에 개장한 청년몰을 1세대로 분류할 수 있다. 당시에는 청년몰 지원금도 15억원에 불과했고 사후관리 사업도 없었기 때문에 폐업률이 높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2018년부터는 사후관리 사업도 새롭게 추진하고 청년몰 지원금도 높였다”며 “이를 통해 지난해 개장한 청년몰은 생존률이 98%에 이른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제도적으로 보완할 것은 거의 해결된 셈”이라며 “올해부터 ‘청년상인 사관학교’를 신설, 휴·폐업률을 줄이기 위해 실력 있는 청년 상인을 모집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스냅타임 고정삼 기자

고정삼 (kjs5145@edaily.co.kr)

진중권 전 동양대학교 교수. 사진=뉴스1
진중권 전 동양대학교 교수. 사진=뉴스1

“국감에서 윤석열한테 망신만 당한 모지리들이 링 밖에서 분하다고 단체로 구시렁대는 모양이다.”

23일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전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열린 대검찰청 국정감사 관전평을 남겼다.

진 전 교수는 더불어민주당 김남국·김용민·박범계 의원이 윤석열 검찰총장을 비판한 것을 역으로 지적했다.

그는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압권은 김남국-김용민 개그 콤비의 팀킬 플레이”라며 “김남국 덕분에 박상기가 검찰총장을 찾아가 조국의 선처를 부탁한 사실도 알게 됐고, 요즘 이상해진 JTBC의 보도가 오보였다는 사실도 확인하고, 수확이 좀 있었다”고 말했다.

전날 국감에서 김남국 의원은 “과거 윤 총장이 박상기 법무장관에게 조 장관 사퇴를 건의했다는 주장이 있다”라고 물었다. 그러자 윤 총장은 “답변 원하느냐”고 물은 뒤 “박상기 전 법무부 장관이 (조 전 장관) 압수수색 당일 저를 보자고 했고, 어떻게 하면 선처가 될 수 있겠냐고 여쭤봤다”고 말했다. 그러자 야당 의원들은 “박 전 장관이 검찰총장에게 부정청탁 한 것 아니냐”고 따졌다. 박상기 전 장관만 곤란하게 된 것이다.

또 김남국 의원은 JTBC 보도를 인용해 “1년 전 그집(유흥업소)에 김봉현과 검사들이 왔었고 4월 남부지검에서 그 가게를 조사했다”고 주장했다. 윤 총장은 “김봉현이 남부지검에 간게 5월”이라며 “4월에 남부지검에서 (유흥업소) 조사를 갔다왔다는 게 이해가 안 간다”고 답했다.

김남국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의 대검찰청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질의를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
김남국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의 대검찰청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질의를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

진 전 교수는 “김용민의 슬라이드 쇼도 볼만했다”고 비꼬았다. 진 전 교수는 “뿜었다. 검찰의 죄악상이라고 나열하는 가운데 윤석열이 한겨레신문 기자 고소한 것까지 집어넣었다”며 “그건 오보가 아니라 음해였다. ‘똘마니’라 했다고 발끈해 고소한 사람이 남에게는 성접대 받았다는 모함을 받아도 참으라니”라고 비판했다.

이는 김 의원이 전날 윤 총장에게 언론사 기자를 고발한 것은 검찰권 남용이라고 주장한 것을 지적한 것이다. 그런 김 의원은 자신을 ‘조국 똘마니’라고 지칭한 진 전 교수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진 전 교수는 김 의원이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최강욱 열린민주당 대표, 울산시장 사건 등을 거론하며 검찰이 보복 기소를 한다고 주장한 데 대해선 “자기들이 이제까지 지은 죄들을 쭉 나열했다”며 “왜들 그렇게 살았니. 앞으론 검찰에 불려갈 일 없게 착하게들 살라”고 조언했다.

김용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의 대검찰청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질의를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
김용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의 대검찰청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질의를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

박범계 의원을 향해선 “석열이 형이 변했어? 변하긴 뭘 변해. 그 양반이 어디 변할 사람인가. 180도 돌변한 건 자기지. 자기가 써놓은 글이 있고, 뱉어놓은 말이 있는데, 대체 뭔 소리를 하는지”라며 “구조적 망각을 실천하는 건 민주당 종특”이라고 했다.

그는 “이래서 공수처가 있어야 한다나? 링에서 이겨도 공수처가 필요한 이유가 되고, 링에서 깨져도 공수처가 필요한 이유가 되고. 두뇌의 논리회로가 참 재밌다”고 비꼬았다.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이낙연 대표가 “검찰총장의 발언과 태도가 검찰개혁이 얼마나 어려운지, 공직자의 처신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내며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의 정당성과 절박성을 입증했다”고 발언한 것을 지적한 걸로 보인다.

서한길 동아닷컴 기자 street@donga.com

김지은 씨가 2017년 봄 서울에 한의병원을 개업한 뒤 자신의 명패 앞에서 활짝 웃고 있다. 김지은 씨 제공

1990년대 중반 북한에는 ‘고난의 행군’이라고 불리는 대기근이 휩쓸었다. 거리에 바싹 마른 시체들이 방치됐다. 병원 침대에선 영양실조로 실려 온 아이들의 눈빛이 꺼져가고 있었다. 의사들이 할 일은 없었다.

함경북도 청진 시 중심부 포항구역의 한 병원 소아과 의사였던 김지은 씨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괴로움에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병원에는 포도당, 링거가 한 방울도 없었다.

“퇴근하면서 병상을 돌아봤어요. 내일 여기 누워있는 아이들 중 누가 남아있을까. 퇴근할 때마다 뒤통수에 희망과 기대의 눈빛이 꽂혀요. 의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죽어가는 아이를 보며 우는 부모 곁에서 같이 울어주는 것뿐이었죠. 더는 병원에 의사란 이름으로 있을 수가 없었어요.”

1999년 3월 아직도 꽁꽁 얼어붙은 두만강을 넘어 그는 중국으로 넘었다. 품에는 아버지가 유언처럼 써준 편지가 있었다.

# 아버지의 유언

김 씨는 1966년 청진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1960년대 초반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을 피해 자녀들을 데리고 북한으로 들어갔다. 형제들 중 그만 유일하게 북에서 태어났다.

학교 때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꿈은 법조인이 되는 것. 그러나 출신성분 제도가 엄격한 북한에서 중국 출신 부모를 둔 그가 유일한 법학부가 있는 김일성대에 입학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언니처럼 사범대학에서 교사가 되려 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기어코 반대했다.

그의 아버지는 북한에 와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중 다리를 다쳐 장애인 판정을 받았다. 이후 병원에서 보일러공 겸 세탁 일을 했다. 어머니는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듯 했다. 딸은 꼭 병원 의사를 시키고 싶어 머리를 싸매고 누웠다.

끝내 어머니의 뜻을 꺾지 못하고 청진의학대학 동의학부에 입학한 김 씨는 만 7년 과정을 마치고 1988년 졸업한 뒤 포항구역병원 내과의사로 배치됐다. 북에서 10년 동안 의사를 하면서 내과와 소아과에서 근무했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사망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중병으로 집에 누워있었다. 김일성 사망 소식을 듣자 오랫동안 뭔가를 깊이 곰곰이 생각하던 아버지는 편지를 한 장 쓰더니 딸에게 주었다.

“지은아, 이 편지를 병원 초급당비서에게 갖다 주어라.”

병원 초급당비서와 함께 읽은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내 딸을 당에 바칩니다. 딸을 바치는 것으로 오랫동안 노동당원 생활을 해왔던 저의 마지막 당비를 대신합니다.”

집에 돌아온 딸에게 아버지가 물었다.

“당비서가 편지를 받고 어떤 반응이더냐.”

“아주 좋아하던데요.”

며칠 뒤 아버지는 다시 딸을 조용히 불러 편지 한 통을 건넸다.

“이 편지는 네가 잘 간직해라. 언젠가 길이 생기면 꼭 가거라.”

김 씨가 편지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중국에 있는 아버지의 누이동생 등 친척들의 주소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편지를 건넨 아버지는 그날부터 단 한 끼도 먹지 않고 단식을 시작했다. 온 가족이 매달려 애원하고 사정해도 끝내 아무 것도 먹지 않더니 9일 만에 숨을 거두었다.

# 탈북

아버지가 스스로 삶을 마감한 이후 김 씨의 머리 속에는 오랫동안 의문이 맴돌았다.

‘왜 아버지는 이렇게 상반된 두 가지의 편지를 내게 준 걸까?’

당시까지만 해도 김 씨는 병원에서 열심히 일해 초급당비서가 되는 게 목표였다. 그러나 김일성 사망 이후 닥쳐온 고난의 행군을 거치며 의사의 삶에 회의를 느꼈다.

초급당비서 방을 청소하다 우연히 본 서류 한 장도 그의 꿈에 절망을 심어주었다. 병원 초급당비서는 병원 종사자 중 일본, 중국, 미국 등 해외에 친척이 있는 사람들의 명단을 따로 관리하고 있었다. 김 씨는 북에서 당 비서는커녕 요시찰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중국으로 탈북했다. 다시 북송됐다가도 몇 달이면 또 사라졌다. ‘중국이 어떤 곳이기에 저 사람들은 저렇게 고문을 받고도 다시 나가는 걸까’ 의아했다.

김 씨는 아버지의 편지를 꺼냈다. 아버지의 형제들, 어머니의 형제들 모두 살고 있는 중국에 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는 병원에 사표를 내고 나왔다.

고난의 행군 시절 무너져가는 나라를 보며 김 씨는 비로소 아버지가 남긴 편지의 의미를 깨달았다. 첫 편지는 딸이 이 땅에 살게 될 경우를 대비해 노동당에 보험용으로 보낸 것이고, 두 번째 편지는 이 땅을 떠날 상황이 되면 중국에 사는 친척의 도움을 받으라는 의미였다. 몇 년 뒤 대량탈북이 시작돼 사람들이 중국으로 줄지어 넘어가던 시절, 김 씨는 ‘이것이 아버지가 말한 길이었구나’라고 생각했다.

1999년 3월 아직 얼음이 가득한 두만강을 넘었다. 그때만 해도 그는 여전히 중국의 친척들을 만나 경제적 도움을 받고 다시 북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 개 먹이에 받은 충격

두만강을 넘은 그가 어디로 갈지 몰라 한 중국 마을을 서성일 때 60대로 보이는 여인이 다가오더니 “조선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그러더니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 밥상도 차려주고 젖은 옷도 갈아입혔다. 대량 탈북 초기 연변에는 북에서 굶주려 넘어온 탈북민들을 호의적으로 대해준 조선족들이 많았다.

친척을 찾기까지 거의 보름 동안 그 집에 머물렀다. 한번은 밖에 나갔더니 그릇 안에 이밥과 고기가 얼어 있었다. 김 씨가 말했다.

“아무 것도 안하고 있는 저에게 매일 따뜻한 밥을 해줘서 고맙습니다. 새로 밥을 짓지 마시고 여기 있는 밥과 고기를 데워 먹으면 좋겠어요.”

그러자 여인이 말했다.

“그건 사람 먹는 게 아니야. 개를 먹으라고 준건데, 느끼해서 잘 안 먹어.”

김 씨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 순간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어요. 머리 속에 깊이 박혀 있던 영양실조로 죽어간 아이들의 얼굴들이 떠올랐어요. 중국은 농촌 개조차 이밥에 고기국을 배불러 먹지 않는데, 내가 지금까지 어떤 교육을 받고 세뇌돼 살아왔는지 돌아봤죠. 충격으로 그때 친척집에 가기 전까지 한 9일 동안 말을 안했던 것 같아요. 도움을 받고 다시 북에 가려 했는데 그때 그 생각이 무너져 내렸어요. 저 땅에 다시 가고 싶지 않았죠.”

1960년대부터 김일성은 “이밥에 고깃국을 먹고 기와집에 비단옷을 입는 세상이 공산주의다”고 규정하고, 공산주의 건설을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인민을 추동했다. 그러나 인민이 받은 대가는 굶주림이었다. 반면 수정주의로 나간다며 그렇게 비판한 중국에선 개들도 이밥에 고깃국을 먹고 있었다.

# 처음 만난 한국 오빠

1999년 옌볜(延邊) 조선족자치주 룽징(龍井)에 있는 고모 집에 머물 때였다. 발이 넓기로 유명한 이웃집 여인이 “내가 한국 사업가들을 여럿 아는데, 그중 한 명이 북에서 여의사가 넘어왔다는 말을 듣고 꼭 한 번 만나게 해달라고 조르더라”고 했다.

그때까지 한국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 김 씨는 거절했다. 그러나 여인이 하도 졸라대자 “북한 얘기를 하기는 자존심이 상하니, 그걸 묻지 않는 조건으로 만나보겠다”고 답했다.

약속한 시간이 되자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고 앉아있는 김 씨의 귀에 쿵쿵 큰 발걸음소리가 들려왔다. 50대로 보이는 남자가 문을 벌컥 열더니 싱글싱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진짜 덥다. 그쵸?”

그 한마디가 김 씨의 긴장된 마음을 녹였다.

“뭐야. 무시무시한 남조선 괴뢰도당이 아니라 흔한 동네 오빠잖아.”

남자는 갈 때까지 약속한 대로 김 씨의 자존심에 상할 말은 전혀 꺼내지 않았다.

며칠 지났을 때 이웃 여인이 시장에 가자고 하더니 비싼 옷을 사주었다.

속으로 ‘옷이 날개라고, 북에서 온 내가 이렇게 입으니 때벗이 했네’라고 은근히 좋아할 때 그 여인이 말했다.

“저번에 왔던 남자 말이야. 가면서 ‘자존심 강한 여자 같은데, 나중에 옷 한 벌 사주라’고 돈을 주고 갔어.”

김 씨는 지금도 그때 딱 한번 봤던, 처음 만났던 한국 ‘오빠’를 잊지 못했다.

“어디 사는지, 누구인지 지금도 모르지만, 1999년 룽징에서 북한 여의사 구경 왔던 남자를 한번 만나봤으면 좋겠어요. 이젠 70대 노인이 됐겠네요.”

# 베이징으로 가다

언제까지 고모와 친척들에게 의탁해 살 순 없었다. 친척 소개로 헤이룽장(黑龍江) 성 무단장(牧丹江)의 어느 마을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9개월 머물며 열심히 중국어를 공부했다. 하지만 워낙 조용한 동네라 수상한 여자가 있다는 신고가 들어갔고 어느 새벽 공안에 체포됐다. 공안들은 그의 중국어를 듣고 북에서 넘어온 지 1년 됐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북송될 운명을 걱정할 때 마을에서 알고 지내던 치보(治保) 주임이 파출소에 찾아와 안면이 있는 공안들을 만나 석방해달라고 사정했다. 치보는 중국 마을마다 있는 민경이라 할 수 있다. 공안은 ‘이곳에 있지 말라’는 석방 조건을 걸었다.

치보가 물었다.

“여기 더 있을 수 없으니 이젠 딴 곳에 가시오. 어디로 가고 싶어요?”

김 씨는 조용한 곳에 오래 숨어있긴 어려우니 도시로 가야겠다고 생각해 “베이징으로 가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치보가 베이징행 열차표와 중국돈 20원을 주었다.

“제가 중국에서 만난 사람들은 참 좋은 사람들이었어요. 정말 열심히 도와줬거든요.”

베이징 기차역을 나설 때 막막했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베이징 역 앞을 배회하다 치마저고리 여인이 그려진 간판을 보았다. 다짜고짜 들어가 일자리를 구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베이징 생활이 시작됐다.

식당 일을 배워 한국인 유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대학에 ‘코리안푸드’라는 이름으로 도시락까지 팔게 됐다. 그러나 위생증이 없는 것이 드러나 이것도 오래 하지 못했다. 민박 청소와 빨래 등을 하다 베이징의 한 대학에 교수로 온 한국인 가정에 가정부로 들어갔다.

# 은인이 된 한국 여교수

한국 여교수는 김 씨보다 3살 어렸고, 5살 된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남편은 한국에서 교수를 하고 있어 베이징에 없었다.

김 씨는 여교수에게 탈북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한국에 국제결혼을 하려다 돈을 사기당해 연변으로 돌아갈 수 없는 조선족 여인이라고 소개했다.

김 씨는 그를 떠올리며 “여교수는 굉장히 높은 인격을 보여주었다”고 회상했다.

침대를 붙여 같이 자자고 청했고, 자기가 있을 때는 절대 청소를 못하게 했다. 쇼핑을 하게 되면 꼭 김 씨의 옷 등을 사와 선물했다.

여교수는 늘 “아주머니는 조금만 가르치면 공부를 참 잘할 것 같다”며 컴퓨터와 인터넷도 가르쳤다. 그렇게 안착한 듯했던 생활은 길지 않았다.

어느 날 여교수가 말했다.

“이젠 계약 기간이 끝나 한국에 돌아가야 해요. 한국에서 남편이 데리러 오는데, 아주머니는 여전히 한국에 갈 생각이 있으세요? 제가 초청장을 보내드릴 테니 우리 집에 와주세요. 한국에 가서 애 하나 더 낳으려는데 아주머니가 키워주세요.”

그 때 김 씨는 자신이 사실은 탈북한 북한 여의사라는 것, 중국인 신분이 아니라 한국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미리 말해주셨어야죠. 제가 정말 잘해드렸을 텐데….”

“이미 저에게 충분히, 너무 잘해 주셨어요.”

둘은 부둥켜안고 한참 울었다.

서울에 돌아온 여교수는 몇 달 뒤 자기 대학에서 탈북한 학생을 찾아냈다. 그를 통해 어떻게 하면 한국에 올 수 있는지, 어느 탈북 브로커와 만나야 하는지 등을 알아냈다.

몇 달 뒤 김 씨는 여교수가 걸어온 전화를 받았다.

“돈은 제가 댈 테니, 제가 알려준 브로커를 만나 한국에 오세요.”

그 덕분에 김 씨는 라오스, 미얀마, 태국 등을 거쳐 2002년 3월 14일 한국 땅을 밟았다. 그때 만난 여교수는 지금도 서울의 모 대학에서 교수로 있다.

“베이징에서 키웠던 5살 아이가 이젠 20살이 훌쩍 넘었죠. 지금도 우리 둘은 가깝게 지내고 있어요.”

김지은 씨가 지난해 한국 의료봉사단의 일원으로 인도를 찾아가 현지 주민들을 상담해주고 있다. 김지은 씨 제공.
김지은 씨가 지난해 한국 의료봉사단의 일원으로 인도를 찾아가 현지 주민들을 상담해주고 있다. 김지은 씨 제공.

# 유서

2003년 어느 날, 김 씨는 혼자 눈물을 흘리며 유언장을 써내려갔다. 한국 사회에 첫 발을 내 디딘지 1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정말 목숨을 끊으려 했어요. 도무지 앞길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죠.”

한국에 오자마자 사기를 당해 정착금을 모두 잃었다. 많은 탈북민이 그랬듯 그도 정착하자마자 교회에 다니게 됐다. 한 여인이 언니라고 부르라며 친근하게 다가왔다.

“아직 직업이 없지. 집에 앉아 놀면 뭐해. 네트워크 사업을 하는 곳이 있으니 거기 다니면 한국 사람도 많이 만나 정착도 빨리 하고 돈을 많이 벌 수 있어.”

김 씨는 네트워크 사업이 최신 기술을 다루는 회사인 줄 알았다. 자기 시간을 활용하며 공부도 할 수 있겠다고 좋아했다. 그러나 전 재산을 잃는 데는 반년도 걸리지 않았다.

그가 자살까지 결심한 데는 더 큰 이유가 있었다.

탈북민이 한국에 오면 한국 정부는 북한 학력 인정 서류를 발급해 준다. 김 씨도 의대 졸업과 의사 경력을 인정받아 교육부에서 발급한 “한국에서 6년제 의대를 나온 자와 동등한 자로 인정한다”는 경력서류를 받았다. 이 서류로 의사 국가고시를 보려 했다. 그러나 보건복지부는 “북한 경력으로 고시를 볼 수 없으니 의대를 다시 다녀야 한다”고 했다. 의대에 입학하려 서류를 냈더니 이번엔 교육부에서 “한 사람이 같은 전공을 두 번 공부할 수는 없다”며 거절했다. 당시 법으론 의사 고시를 볼 수도, 의대를 다닐 수도 없는 처지가 돼 한국에서 의사를 하겠다는 김 씨의 꿈은 허물어졌다.

“북에 가서 의대 졸업증과 의사 증명서를 갖고 오라더군요. 한국에 와서 거짓말탐지기까지 통과하며 인정받았는데 북한 서류를 갖고 오라니 황당했죠. ‘그럼 북에 가서 증명서 갖고 올 테니,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하지 않겠다고 장담할 수 있느냐’고 따졌더니 그건 또 못한다고 하더군요.”

살아갈 의욕을 잃었다. 그냥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던 시기였다.

# 살아야 할 이유

유서를 쓰면서 지나온 삶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살면서 지금보다 더 힘들 때가 있었던가를 돌아봤다. 중국에서 두 번씩 체포돼 북송 위기에 처했을 때도 죽지 않았는데, 지금은 따듯한 집도 있고 밥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데 왜 죽을 생각이 드는지 반성했다. 그리고 그는 살아야 할 이유 네 가지를 찾아냈다.

첫째는 죽을 생각이 드는 것은 자존심과 욕심 때문이라고 결론 냈다. 한국에 와 “나는 의사가 안 되면 안 돼”라는 생각이 좌절을 부른 이유라고 생각했다. ‘내가 꼭 의사가 돼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나. 일반 회사라도 다니면 되지’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두 번째는 “중국에서 한국에 오지 못하고 생사의 고비를 넘고 있는 탈북민이 얼마나 많은데, 정말 행운으로 한국에 일찍 와놓고, 죽을 생각을 하는 모습을 본다면 다른 탈북민들 눈에는 ‘놀고 있네’라고 비춰질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세 번째는 자존감이었다. 북한에선 탈북민을 배신자라고 하는데, 꼭 여기서 성공해서 고향에 돌아가 “나는 누구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를 보고 왔으니 우리도 그렇게 돼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앞선 세 가지보다 더 큰 이유가 네 번째였다. 김 씨는 북에서 남들처럼 20대 중반에 결혼했다. 1년 만에 이혼으로 끝났지만, 아들이 태어났다. 이혼할 때 시댁은 마음을 바꿔 돌아오라며 아들을 내놓지 않았다. 아들을 보고 싶었고, 그 아들이 “엄마는 날 버리고 혼자 한국에 가서 무책임하게 죽었다”고 평생 원망할 거라 생각하면 견딜 수 없었다.

그는 결국 죽음의 유혹을 이겨냈다. 의사 대신 한국의 일반 회사에 취직했다. 살아야 할 이유를 찾고 나니 딱딱하게 굳어있던 얼굴이 풀리고 미소가 돌아왔다.

회사를 다니며 사람들과 친해지자 사장과 이사들이 오히려 더 격려했다.

“당신이 한국에 와서 의사가 될 수 없는 이유를 들으니 너무도 불합리해 우리가 납득할 수 없다. 싸워야 한다.”

그들의 주선으로 그는 2004년 10월 국회 국무조정실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나가 진술했다. 그랬더니 의대 입학 허가가 났다. 의사 경력이 있으니 예과 2년을 건너뛰고 본과 4년만 다니면 된다고 했다. 그가 대학에 다니던 몇 년 뒤엔 북한 의사 출신이 한국 의사 국가고시에 응시할 수 있도록 법도 바뀌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대학에 몇 년 다니던 때라 그는 시험 대신 대학 졸업을 선택했다. 김 씨는 남북에서 의대를 나온 흔치않은 경력을 소유하게 됐다. 그의 노력으로 이후에 온 다른 탈북 의사들은 의사 고시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됐다.

2009년 2월 세명대 한의과대학 졸업식에서 꽃다발을 가득 받아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김지은 씨. 김지은 씨 제공
2009년 2월 세명대 한의과대학 졸업식에서 꽃다발을 가득 받아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김지은 씨. 김지은 씨 제공

# 상봉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2009년 대학을 졸업했고, 그해 부천에 한의원을 열었다. 북한에서 의대 동의학과를, 한국에서 한의대를 나온 그에게 언론은 ‘남북한 통합 한의사 1호’라는 타이틀을 붙여 주었다. 2017년 한의원을 서울로 옮겼다. 받은 사랑에 보답하겠다는 마음으로 2014년부터 요양원 봉사도 매주 나갔다. 인도네시아, 인도, 태국 등 해외 치료봉사도 여러 차례 다녀왔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성공한 탈북민’이 됐고, 인터넷엔 그를 다룬 기사들이 쌓여갔다.

개인적으로 가장 행복한 일은 아들과의 상봉이었다.

아들이 13살 때 사람을 시켜 두만강까지 데려온 뒤 엄마에게 오라고 설득했다. 한국에 있다는 소리는 할 수 없어 “엄마가 너무 멀리 있어 갈 수 없으니, 엄마를 볼 수 있는 방법은 네가 오는 길밖에 없다”고 설득했다. 아들은 할아버지와 살겠다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랬던 아들이 19살 때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

“엄마, 나 지금 가도 돼?”

“그럼, 그럼. 그런데 왜 마음이 바뀌었니?”

“공식적인 이유를 말할까, 비공식적인 이유를 말할까? (“둘 다 말해줘.”) 음. 공식적으론 살아보니 여기선 미래가 없더라고. 열심히 공부 잘하면 될 줄 알았는데, 한계가 있더라고. 비공식적인 이유는 한국 가면 승용차를 가질 수 있고 송혜교, 이지아도 볼 수 있을 것 같아.” 두 연예인은 그때 북한에서 가장 인기 있던 한국 드라마 주인공들이었다.

그렇게 몇 달 뒤 아들이 왔다. 조사기관에 들어가 만남은 허용되지 않았지만 전화통화는 가능했다. 김 씨는 자신이 그토록 하고 싶었던 ‘사랑한다’는 말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늘 꿈 꿔오던 스스로의 미션이기도 했다.

전화 말미에 “아들, 사랑해”라고 말했다. 전화기 너머에선 아무 대답이 없었다. 북에선 사랑한다는 말을 연인 사이에서도 잘 쓰지 않는다.

며칠 뒤 다시 통화가 되자 그는 또 “아들, 사랑해”라고 말했다. 이번엔 전화기 너머 자기도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어, 어, 어”하는 짧은 소리가 들려왔다. 세 번째 통화에서 또 사랑한다고 말했다. 이번엔 “예, 나도요”라는 대답이 날아왔다. 그는 인생 최대의 기쁨을 느꼈다.

하나원을 졸업하고 아들이 집에 온 날 그는 6살 때 헤어진 아들을 품에 안고 온 밤을 지새웠다. 14년 만의 재회였다. 그 아들이 지금은 한국에서 대학원까지 졸업하고 법조인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 무엇보다 김 씨를 기쁘게 한 건 엄마를 너무나 아끼는 아들, 목표와 실천이 확실한 성실한 청년의 모습으로 자라줬기 때문이다.

# 인생은 마라톤

김 씨는 지난해 말 운영하던 한의원을 접고 경기도의 한 한방병원 부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시간적 여유를 갖고 공부를 하고 싶어서였다. 병원 원장으로 진료를 하고, 단골 고객을 관리하다보니 공부할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그는 올해 서울 소재 한 법학대학 법학과에 입학해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중학생 시절의 꿈이 이끈 것일까. 의사가 법학박사를 꿈꾸는 이유가 궁금했다.

“돈을 버는 것보다 통일될 한반도를 위해 뭔가 기여하는 게 남북에서 의사로 살아본 제 역할이 아닐까 싶어요. 이제 와서 부자가 될 것도 아니고, 될 수도 없는데, 돈은 살만큼 벌면 되잖아요. 언젠가 통일이 되면 남북한의 의료통합도 중요한 문제가 될 거예요. 미리 한국과 북한의 의료법과 규제를 공부해 어떻게 합리적인 통합 체계를 만들지를 고민해야죠. 한국에 먼저 온 사람으로 다음 세대를 위해 지렛대가 되고 싶어요.”

그는 삶을 마라톤에 비유했다.

“마라톤은 꼴찌를 해도 박수를 받는 종목이잖아요. 시작하자마자 앞서 간다고 1등이 아니고, 마지막을 빨리 간다고 해도 1등이 안돼요. 누가 나를 앞질러 가도 조급해 하지 않고 인내와 끈기를 갖고 자신만의 페이스를 지키며 완주하는 게 중요하죠. 주저앉지만 않고 계속 가면 경기장에 들어갈 것이고, 등수와 상관없이 누군가는 나를 기다렸다 박수를 쳐주지 않겠어요. 그건 포기하지 않고 와준 과정에 대한 찬사라고 생각해요.”

김 씨의 마라톤 예찬을 들으며 과연 그는 지금 마라톤 코스의 어디쯤에서 뛰고 있을까 상상했다. 반환점은 돌았을까. 그가 생각하는 결승점은 어디일까. 남북한 통합 한의사 1호에 법학박사까지 받으면 경기장이 보이는 것일까.

고백한다면 기자는 그와 하나원 동기이다. 18년 전 우리는 똑같은 날, 똑같은 시간에 하나원을 나와 한국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취재수첩을 닫으며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이 말을 건넸다.

“우리 그동안 참 열심히 살았죠?”

“그러게. 정말 열심히 달려왔지.”

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온갖 사연을 머금은 눈빛이 수천 마디 말을 대신해 허공에서 만났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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